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문단 편집) == 배경 == 인도네시아의 독립에 대한 열망은 이미 20세기 초부터 일어나고 있었다. 인도네시아의 독립 영웅이자 국부로 추앙받는 [[수카르노]]가 활동한 것도 이 시기였다.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고 일본은 동남아로 진군해 [[자바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인도네시아를 점령함으로서 많은 이득을 손쉽게 챙길 수 있었다. 일본은 인도네시아에 [[일본령 동인도]]를 설립해 군정을 실시했다. 한때 동남아 해방자로 여겨졌던 일본도 동남아 점령지에서 제국주의적 통치를 펼쳤지만 그 과정에서 인도네시아 독립에 기여한 면도 있었다. 예를 들면 일본은 행정, 군사, 제도적으로 인도네시아에서 네덜란드 식민통치 체제를 배격했고 언어 또한 [[네덜란드어]]의 사용을 금지하고 [[일본어]]의 사용을 권장하였는데 이게 싫으면 [[인도네시아어]]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해 주었다. 일본은 보조 병력으로 쓰기 위해 인도네시아 국민들에게 군사 훈련을 실시했다. 1942년 말 [[탕그랑]]에 '청년도장'(青年道場)이라는 이름으로 중졸 학력[* 식민지 시대에 최소 10년 정규 교육을 받은 중졸자는 전체 인구 중 소수 엘리트였다.]이 있는 토착민에게 게릴라전, 정보전 등을 가르치는 특수전 학교가 설립되었다. 일본군은 보다 대대적인 규모의 토착군 조직 '향토방위의용군'(郷土防衛義勇軍, PETA)을 1943년 10월 3일 창설했다. 우선 일본군은 [[보고르]]에 간부 학교 '의용군 연성대'(義勇軍錬成隊)를 설치해 기존 청년도장 출신 등 학력이 높은 엘리트 토착민을 입교시켜 장교 교육을 실시한 뒤 이들을 고향으로 내려보내 각각 약 500명 규모의 대단(大団, 대대)을 결성시켰다. 이 아래에 중단(중대), 소단(소대), 분단(분대)이 조직되었다.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향토방위의용군은 종전 시점 자바에 66개 대단, 발리에 3개 대단(여기까지 합쳐 약 37,000명), 수마트라에 약 20,000명 규모로 합계 약 6만 명 수준이었다. 군사 훈련은 기본적으로 모두 일본군 방식대로 일본군 육군 야전교범, 즉 보병조전(歩兵操典)을 기준으로 행해졌지만 물자가 부족한 등의 문제로 전반적으로 군사 훈련 자체가 그렇게 강도 높게는 이루어지지 못한 편이었다. 대신 일본군은 충성, 용기, 불굴 등 정신력을 강조하면서 곧 맞이할 인도네시아 독립을 준비시켰다. 이들이 바로 독립전쟁에서 인도네시아군의 근간이 되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동시에 토착민을 노무자(労務者, 로무샤)로 징용해 철로 건설 등 군사 프로젝트에 동원하기도 했다. 노무자(로무샤)라는 용어는 명확하게 정의되지는 않은 통칭이며 무급 노동자부터 자원자까지 다양한 분류를 포함하는데 자바에서 적어도 20만에서 50만 명의 노무자는 일본군의 강요로 일해야 했다. 미 국회도서관 자료는 자바에서 모든 분류를 포괄하는 노무자의 총 수가 400만에서 1000만에 달할 것으로 추정했다. [[유엔]]은 일본 점령기 인도네시아에서 400만가량의 인도네시아인이 점령 도중 벌어진 기아[* 일본군이 점령지에서 식량을 공출해 민간에서 식량이 부족해지기도 했다.]와 노역으로 사망했다고 추정한다. 1944년부터 토착민들은 일본군의 가혹한 처우에 반발해 가끔 봉기를 일으켰지만 모두 진압당했다. 특히 1945년 2월 14일 동부자바 블리타르에서는 향토방위의용군 대단장 수프리야디(Soeprijadi)가 자신의 대단을 이끌고 [[반일]] 봉기를 일으켜 일본인 4명을 살해했지만 곧바로 진압당하기도 했다. 또 일본군은 인도네시아에 작게는 [[아리사카]] 소총부터 [[하고]] 전차, 크게는 [[G4M]] 폭격기까지 일제 무기를 많이 남겨 놓고 갔는데 이 또한 독립전쟁 때 큰 보탬이 되었다. || [[파일:Javaanse_Revolutionairen_strijden_voor_onafhankelijkheid.jpg|width=100%]] || || 일제 무기와 죽창으로 무장한 자바 혁명군 || 허나 이러한 일본의 지배도 얼마 가지 못했는데 [[태평양 전쟁]]이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제국의 본토에 핵폭탄 두 방을 내리꽂는]] 결말로 끝나버렸기 때문이다. 일제는 패색이 짙어지자 '''적국'''인 네덜란드에게 다시 빼앗기느니 차라리 독립을 시켜 주겠다고 했으며 이로 인해 인도네시아는 일제가 항복한 직후인 1945년 8월 17일 '''독립을 선언했다'''. 이후 수카르노를 대통령으로 선출한 '인도네시아 중앙 국가위원회(KNIP)'는 일제의 항복으로 발생한 행정 공백을 빠르게 메꾸려 했으나 인도네시아에는 연합군이 진군하기 시작했다. 인도네시아 동쪽에는 오스트레일리아 육군이, 자바 섬을 비롯한 중앙 인도네시아 쪽에는 영국군이 상륙했으며 억류되어 있던 네덜란드 식민지 군대 문제, 그리고 잔여 일본인들의 송환 문제를 다루기 시작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